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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일 근무로 가능해진 8박9일의 여름휴가는 사실 김 씨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 떠나는 긴 여행이 될 것이다.


그는 8월 하순 아내와 여덟 살인 딸과 함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오를 계획이다. 일찌감치 계획을 세운 덕분에 자신의 비행기 좌석은 마일리지로 확보했다.



그는 요즘 시간만 나면 인터넷에서 여행 후기를 읽거나 네팔에서 머물기로 한 숙소 ‘빌라 에베레스트’의 홈페이지를 뒤진다. ‘빌라 에베레스트’는 박영석 씨-얼마 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우리나라 산악인-가 운영을 하다 얼마 전부터 현지인인 앙드로지라는 셀파가 운영하는 곳이다. 그는 이곳에 가면 ‘휴가에 미친’ 사람이 자신뿐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김 씨는 8박9일 동안 온 가족이 히말라야까지 다녀오면 아무리 아껴 쓴들 경비가 만만찮아 가을, 겨울 내내 쪼들릴 것이 뻔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여행이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 여행서적 특설 매장에도 점심시간이 되면 이런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여성 직장인들이 특히 많다.


“스페인을 넣어서 8일 동안 파리까지 돕시다.”


“비행기 값 부담이 크니까 숙소는 가장 싼 데로 가기로 해요.”


“스위스 알프스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요.”


“인터넷에 사정을 올리면, 비행기표 공구(공동구매)하고 현지까지 같이할 사람들 쉽게 찾아요.”


배낭여행자들의 복음서 ‘론리플래닛’과 최근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저스트고’ 너머로 오가는 8박9일 ‘여행병자’들의 대화에서 3박5일의 동남아 패키지 여행안 같은 건 아예 찾아볼 수도 없다. 이들의 대화는 ‘저스트고’가 저렴한 정보에서부터 꽤 ‘럭셔리’한 정보까지 모두 포함해 유용하다거나 지도가 ‘길치’도 볼 수 있을 만큼 보기 편하다거나, 그래도 ‘론리플래닛’의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정보가 실제 상황에선 유용하다는 등 여행서적 분석이 수준급에 이른다.


또한 뮤지컬이나 미술관을 샅샅이 훑겠다든가, 등반을 하겠다는 식으로 원하는 것도 분명하다. 미술관에서 미식(美食), 예술 카페까지 테마별 여행 서적이 많아진 것도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한다.

광화문 지역 한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한 여성 직원은 “회사 분위기가 썩 좋진 않지만, 올해는 일단 떠나기로 했다”며 “점심시간마다 고등학교 친구를 서점에서 만나 여행 계획을 짜는 게 요즘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여기 모인 또 다른 직장인은 “8박9일 동안 떠난다고 생각하면, 마치 사표 낸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며 즐거워했다.


그는 “싱글인 여성 직원들이 8박9일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고, 한창 공부하는 나이의 자녀를 둔 남자 직원들이 가장 몸이 ‘무거운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는 한 임원급 직원은 “휴가를 짧게 가서 회사에 충성한다는 국내 회사 분위기와는 좀 다르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여름휴가를 얼마나 ‘모험적’으로 가는지도 에너지와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대개 9박10일이나 10박11일로 미국이나 호주 횡단 같은 휴가 계획을 짠다”고 말했다. 그는 올여름 모터홈을 직접 운전하여 가족과 함께 호주의 동부 해안을 따라 종단한다는 휴가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이다.

민족사관고 교사인 강문근 씨 등 직업을 가진 ‘중증’ 여행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여행정보 사이트 ‘트래블게릴라’의 편집장 김슬기 씨는 “30대 직장인 중 1년에 두 번 가는 휴가에 목숨 건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주5일 근무의 영향으로 증가세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90년대 여행자유화 시대 이후 대학을 다닌 30대 직장인들 중 주5일 근무에 따른 ‘8박9일’ 휴가를 제대로 즐기려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월급을 모아 휴가에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단체 패키지여행은 한 번 경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월급쟁이들이 ‘8박9일’의 외국여행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만만치 않은 비행기 경비. 그러나 여름휴가에 ‘목숨’ 걸었다면 평소 꼬박꼬박 항공사 제휴 신용카드로 쌓은 마일리지로 공짜 비행기표를 얻을 수 있다.


마일리지는 조부모와 손자까지 상호 공제가 가능하며, 항공사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성수기 기준(대한항공은 7월15일~8월28일, 아시아나는 7월20일~8월20일)으로 유럽은 대개 10만 마일, 동남아시아는 6만 마일, 일본은 4만5000마일로 이코노미 항공권을 지급한다. 그러나 마일리지로 얻은 보너스 항공권의 가장 큰 문제는 쓰고 싶을 때 쓸 수 없다는 점. 항공사에서 일반 운임 승객과 보너스 항공권 승객을 별도로 운영하므로 좌석 수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요령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출국할 가능성이 있는 몇 개 후보 일에 복수로 예약을 해두는 것입니다. 대기자도 항공사에서 받아준다면, 좌석이 날 가능성이 크므로 최소 4개 항공편 정도 명단에 올려놓습니다. 더욱 확실하게 떠나려면 여름휴가는 연초에 항공권을 예약하고, 겨울휴가라면 여름에 올리세요.”


한 여행사 직원은 이렇게 귀띔하면서 현재 마일리지 제도에서 소비자에게 가장 효율적인 공제 방법은 ‘마일리지로 이코노미석을 사서 프리스티지(비즈니스)석으로 승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 마일리지 제도상 가격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기 때문인데, 실제로 해외여행 경험자들이 많아지면서 서비스에 대한 욕구가 커져 마일리지로 프리스티지석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또 성수기에 마일리지가 50% 정도 추가로 요구되기 때문에, 성수기보다 직전과 직후에 마일리지 좌석 경쟁률이 오히려 더 높다는 것도 기억하자.


마일리지 없이 항공권을 구입할 때 기본 원칙은, 싼 항공권을 구입하려면 일정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더 싸게 구입하려면 싼 항공권에 자기 일정을 조정하면 된다. 현재 가장 싼 항공권을 입수하는 곳은 여행 루트를 특화해 관광객을 많이 보내는 전문여행사들이다. 전문여행사들은 항공사에서 50% 할인한 항공권을 받으므로, 출발일 직전 이런 여행사를 통해 나오는 일종의 ‘떨이’ 표가 가장 싸다.


탑항공사 박준원 과장은 “여행에서 가장 큰 사고는 비행기표 때문에 예정일에 떠나지 못하고, 이튿날 출근해야 하는데 휴가지에서 좌석을 구하지 못한 경우다. 이런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공신력 있는 여행사를 이용하라는 것은 이런 경우 적절한 보상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싼 항공요금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여행 후 결산해보면, 항공비 비중이 전체 경비에서 절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더 절약할 기회가 많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국내 최저가’라는 여행사의 말에 지나치게 현혹될 필요도 없다. 이런 팻말을 내건 여행사들―대개 사장 한 명, 직원 한 명의 초미니 여행사―에 문의해본 결과, ‘최저가가 아닌 경우 차액을 준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게 공통적 답변이었다.


인터넷 옥션이나 다음 사이트의 여행동호회를 통해 8명 이상 공동구매를 하면 여행사에서 단체요금을 적용해준다. 최근엔 항공사 간 경쟁이 심해진 미국과 중국 노선의 공동구매가 활발하다. 공동구매 항공권을 노린다면 수시로 사이트를 방문해 자신과 맞는 동반 여행객들을 찾는 부지런함이 요구되는데, 이런 일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이 ‘8박9일’ 여행자의 첫 번째 조건이다.


‘트래블게릴라’나 수없이 많은 배낭여행객들의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면 ‘떠나자’는 주장과 권유가 거의 혁명적(?)인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한 줄씩 남긴 ‘나에게 여행이란’이라는 짧은 글들, ‘루트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등의 주장들은 현실을 떠나본 이들의 절절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서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인터넷 다음의 배낭여행가이드 카페도 그중 하나로 마흔 나이를 훌쩍 넘겨 최근 방글라데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는 아이디 ‘험프리’의 여행 후기엔 ‘멋지다’ ‘역시 여행지에선 웃음도 여유 있어 보인다’는 뜨거운 응원의 답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다.

‘(사회적) 위치와 일 때문에 여가를 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착각이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구도자는 아니더라도 여행은 내게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늘 혼자 여행을 다닌다는 아이디 ‘유령’도 ‘그래서 내 사진은 모두 현지인들이 찍어준 것이다. 사진사는 동네 아이들에서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하나하나 개성이 있다’는 글을 올려 동료 여행객들을 전율하게 한다.


올해 6월 한 리크루팅 업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전히 직장인 10명 중 4명은 4일 동안의 짧은 휴가를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극심한 불경기인데도 여름휴가에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한 직장인들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탑항공사의 박준원 과장은 “몇 년 전까지 동남아시아가 대표적인 해외 여행지였지만, 최근엔 대표지가 사라졌다. 대신 여행 마니아들의 코스라고 여겨졌던 중동, 네팔, 티베트 등에 일반 직장인들의 출국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말한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된 첫해, 사표도 내지 않고 8박9일을 꽉 채워 현실을 떠나려는 이들이 ‘철없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란 팀 캐힐 (‘나를 유혹한 낭만적인 곳들’의 저자)의 말에 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울 무교동에서 등산, 트레킹용품 매장을 운영하는 산악인 정광식 씨는 이 같은 직장인들의 심리에 묘한 웃음을 짓는다. 그의 가게엔 늘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여행용품을 사서 떠났던 직장인들이 인도나 네팔에서 ‘완전히’ 달라져 돌아오는 걸 자주 봅니다. 그래서 난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인간들이 살고 있다고 말하지요. ‘그곳’에 다녀온 사람과 다녀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직장인 박은주 씨는 최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숙소 때문에 불쾌한 경험을 했다. 유로화 통합으로 이탈리아 물가가 폭등해 비교적 값이 싼 레지던스를 예약했는데 주인이 동양인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시할 뿐 아니라, 아침식사로 곰팡이가 슨 버터에 타버린 빵을 내놓는가 하면, 밤에는 화장실 사용도 ‘물소리가 시끄럽다’며 금지했다는 것. 물론 전화와 컴퓨터 사용도 엄금했다. 박 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교통이 불편해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찾았을 것’이라며 분개했다.


여행 중의 불쾌한 상황이나 황당한 사태에 대해서 미리 아는 것은 여행지의 풍경과 넉넉한 인심에 대한 감동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박 씨처럼 해외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나 음식점이 그리웠다는 경우도 많지만, 정반대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도 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가까운 도시인 씨암립의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던 한 직장인은 “주인이 현지 직원들에게 너무 무례하고, 우리말로 폭언을 해 같은 한국인으로서 매우 창피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영어가 유창하고, 한식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외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외국 배낭여행객들이 많은-에 묵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고, 영어에 서툴다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묵는 것이 편하다는 게 일반적인 여행 팁이다. 몸이 아프거나 사고를 당할 경우, 그래도 같은 한국인들은 ‘나 몰라라’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배낭여행객 숙소를 운영하는 한국인 사장님들은 인터넷을 통한 ‘입소문’이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알고 있다. 
 


한국인 배낭여행객들이 크게 늘면서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관광지에는 대부분 한국인 운영 B&B나 게스트하우스들이 있다.


최근 배낭여행자들 사이에서 많은 불평과 경고가 나오고 있는 지역은 베트남, 캄보디아 등 갑자기 자본주의화한 사회주의 국가들에 있는 이름난 관광지들이다. 적잖은 배낭여행객들이 값싼 숙박업소와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바가지요금이나 각박한 인심, 불친절 등을 경험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큰 규모의 현지인 여행사들도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을 약점 삼아 약속한 요금보다 많은 금액을 요구하기도 하고, 여행사 실수로 일정이 틀어져도 ‘보상’은커녕 매우 당당하다. 또 같은 술집에서 어제보다 비싼 술값을 요구하면서 ‘여기가 좋아서 다시 온 것이니 돈을 더 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거나, 바가지 술값 요구에 항의하면 ‘주먹’을 부르는 곳도 있다는 것이 여행객들의 체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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